< 교회를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선주
‘손님은 왕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스위스의 세자르 리츠라고 한다. 그는 작은 호텔의 소믈리에로 일하다가 호텔 지배인을 거쳐 파리에서 궁전을 본뜬 호텔을 개업했다. 리츠의 호텔은 실제로 왕족과 귀족들이 주로 이용했다. 그러므로 왕을 손님으로 모시는 일이 그 호텔의 기본 서비스 시스템이 됐던 것이다. 이것이 호텔의 일반적인 서비스가 되면서 고객들은 호텔에서 왕의 의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전은 고급 호텔일수록 더 고급화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화폐로 만민을 평등케 하였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자유를 가져다준 것은 시민혁명이 아니라 화폐경제였다. 누구든지 돈만 있으면 왕과 같은 의전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신분제 계급사회를 파괴해야만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화폐경제는 또 다른 신분제를 낳고 말았다. 계급을 타파한 화폐가 또 다른 계급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 돈만 있으면 그것으로 자기의 신분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신분 과시가 품격을 잃을 때 속된 말로 갑질을 하게 된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청교도 정신에서 찾으며 그것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탐색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말미에 자본주의가 그 정신을 잃게 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경고한다. 그는 자본주의를 매우 보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긍정했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천박해질 수 있는지를 꿰뚫어 본 것이다.
베버의 이러한 우려는 너무 일찍 현실로 나타났다. 자본을 무기로 한 시장 쟁탈전이 제국주의를 발흥시켰고 인간의 윤리와 도덕 감정마저 무너뜨렸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식민지 백성의 고혈을 짜고 타자의 생명을 빼앗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시작과 자본주의 발흥이 궤를 같이하면서 탐욕적 자본주의는 교리적인 지원사격까지 받게 되었다. 이것은 비도덕성에 대한 면제부였다. 미개한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개화시키는 것을 기독교의 지상과제로 삼은 것이다. 가톨릭과의 선교 경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개신교회의 토대가 이렇다 보니 교회는 전도(선교)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의 시장 쟁탈전이 전도(선교)라는 이름으로 각색되면서 교회는 아무 거리낌 없이 성장이라는 진화론적 시장 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회 안에 전도, 부흥, 성장과 같은 낱말들이 반성 없이 성경의 텍스트처럼 받아들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인의 수를 구원받은 사람의 수로 보는 교리는 교회를 마켓 플레이스로 변질시켰다.
마켓에서는 고객의 인격과 자질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지불할 수 있는 화폐의 단위와 수량만을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교인의 신앙을 평가하거나 구원을 논하지 않는다. 세례받고 교회의 맴버십을 갖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 것으로 인정한다. 실천적 행위와 무관하게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 의롭다 칭함을 받는 수동적 구원 의식의 뿌리에는 ‘칭의론’이 있다. 칭의론은 오늘날 기독교를 타락시킨 주범이다. 값싼 은혜와 값싼 구원이 대량생산된 플라스틱 바가지처럼 교회에 넘쳐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교인들의 태도 또한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고객들로 교회가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죄인들의 모임이며 회개와 성찰, 자기 포기를 통해 타자를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공동체다. 그런데 이젠 교인들이 그런 교회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 내가 낸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목회자에게 월급이 지급되니 내가 이 교회의 고객이고 왕이라는 쪽으로 의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식 때문에 교인들은 사소한 일로 언성을 높이고 비난하기 좋아하며 여차하면 교회를 박차고 나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여기 아니면 교회 없나, 하는 심보다. 시장에서 상품을 고르는 것처럼 교회와 신앙도 상품으로 보고 많은 선택지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를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받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교인들의 종교생활 밑바닥에 깔려있다.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종교를 소비하는, 왕 같은 손님이 되었다.
이러한 교인 갑질을 부추긴 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리학에도 원인이 있다. 교회가 심리학을 반성 없이 교회에 유입해서 그것을 과도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기반성과 회개, 낮아짐, 자기 포기, 섬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덕목보다 자존감을 높이는 쪽으로만 심리학을 과용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질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이웃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이기적으로 분화된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플랫폼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어디서도 포기나 양보를 모른다. 회개는 의례화된 교회 이벤트가 되었고 심리적 자기 위안이 되었다.
교회는 마트가 되었다. 왕 같은 제사장이 아니라 왕 같은 고객님들이 진상을 떠는 마트 말이다. 목사들은 타락하고 교인들은 오염됐다. 그리고 교회는 방향을 잃었다. 예수는 없고 교회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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