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3 편 1-3 절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
같이 살수 있을까요?
이산가족상봉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짠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남편과 아내가, 형제들이 짧은 시간 감격의 만남을 가집니다. 너무나 행복해 보입니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곧 헤어져야 합니다. 그것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주름 가득한 얼굴, 손에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짙게 베어 있습니다. 한 평생을 헤어져 살다가 만났는데 그렇게 속절없이 다시 이별입니다. 가족인데, 함께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갈라놓은 걸까?”
시인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에서와 야곱은 큰아들의 권리를 두고 싸웠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남의 나라에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현실에서도 형제간, 가족간의 불화는 뉴스거리도 않 됩니다. 형제자매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에 눈을 뜨면 피는 섞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힘 있는 나라가 힘 없는 나라를 누르고 지배합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나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테러 같은 치명적인 고통을 안기기도 합니다. 남과 북은 분명히 형제인데 함께 어울려서 살지 못했습니다. 남처럼, 적처럼 생각하며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는 형제인 지도 잘 모릅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아름답고 즐겁다고 감탄한 시인은 문학적인 표현으로 그 사실을 강조합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이 수염에 흘러서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것처럼,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리는 것처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이 아름답다고 합니다(2 절). 기름이 온 몸을 적시고 이슬이 산들을 뒤덮는 생명의 충만한 장면을 시인은 상상하는 겁니다.
남과 북이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는 일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계산만 할 것이 아닙니다. 시적인 상상력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그분의 세상을 꿈꿔 보는 것입니다. 시인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는 삶에 하나님께서 영생이라는 복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3 절).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식구들, 이웃들, 북의 형제자매들, 세계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를 힘쓸 것입니다. 거기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복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위한 기도
시인처럼 우리도 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사모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깨닫고 연합의 삶에 헌신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